차량 사이버보안/산업 인사이트

자동차는 언제부터 ‘보안’을 고민하게 됐을까?

vsec 2026. 5. 12. 13:49
자동차 사이버보안 규제 이야기 01
사실 자동차 업계는 오랫동안 사이버보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자동차는 원래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차량이 LTE에 연결되고, 스마트폰 앱으로 시동을 걸고,
OTA 업데이트로 기능이 추가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15년,
자동차 업계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015 Jeep Cherokee 원격 해킹 — Charlie Miller & Chris Valasek

두 보안 연구원은 주행 중인 지프 체로키를 인터넷으로 원격 제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차 안의 운전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공격자는 먼저 에어컨을 최대로 켰습니다. 그다음 라디오 볼륨을 올렸습니다. 와이퍼를 작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가속 기능을 차단했습니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멈춰버렸습니다. 운전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영상이 《와이어드》 지에 공개되자 전 세계 언론이 들끓었습니다. 피아트-크라이슬러는 결국 140만 대를 리콜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자동차 사이버보안 관련 법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유독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해킹 자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차량 한 대가 해킹됐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수천만 대의 자동차가 이미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누구도 그것이 위험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습니다.

자동차는 어떻게 '연결된 기계'가 됐나

지프 해킹이 가능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자동차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봐야 합니다.

과거의 자동차는 말 그대로 닫힌 기계였습니다. 엔진, 브레이크, 에어백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ECU들이 차량 내부 네트워크(CAN 버스)로 서로 통신했지만, 그 네트워크는 차 안에서만 존재했습니다. 외부에서 접근할 방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기 과거의 자동차 지금의 자동차
외부 연결 없음. 완전 폐쇄 구조 LTE/5G, Wi-Fi, Bluetooth 상시 연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정비소에서만 가능 OTA로 원격 업데이트
스마트폰 연동 없음 앱으로 시동·잠금·위치 확인
데이터 수집 없음 주행 데이터 실시간 클라우드 전송
코드 규모 수백만 줄 수억 줄 (일부 모델은 항공기 초과)
테슬라가 2012년 OTA 업데이트를 대중화하면서 자동차의 개념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차를 사고 나서도 새 기능이 추가되고, 성능이 개선되고, 버그가 수정됩니다. 편리함은 분명하지만 — 소프트웨어가 있고 네트워크가 있으면, 반드시 취약점이 생깁니다.

경고는 계속 있었다 — 하지만 업계는 듣지 않았다

지프 해킹이 처음부터 갑작스러운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수년간 경고가 있었습니다.

2010
UC 샌디에이고·워싱턴대 — 첫 번째 경고
보안 연구팀이 차량 내부 네트워크에 물리 접근해 브레이크와 엔진을 원격 제어할 수 있음을 학술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업계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물리 접근이 필요하지 않냐"며 위협을 축소했습니다.
학술 연구
2011
동일 연구팀 — 원격 공격 가능성 입증
이번엔 물리 접근 없이 블루투스, 텔레매틱스, CD 플레이어를 통한 원격 공격이 가능함을 보였습니다. 업계는 여전히 "실제 공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대응을 미뤘습니다.
학술 연구
2015
지프 체로키 해킹 —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학술 논문이 아닌 실제 도로 위 주행 중 해킹이 전 세계 언론에 공개됐습니다. 140만 대 리콜, 미국 의회 청문회. 자동차 사이버보안이 처음으로 대중의 이슈가 됐습니다.
보안 사고
2016~
2019
연이은 취약점 — 특정 브랜드 문제가 아니었다
테슬라 원격 해킹, 닛산 리프 API 취약점, BMW 취약점 14건 발견이 잇따랐습니다. 한두 회사의 실수가 아니라 업계 전체의 구조적 문제임이 드러났습니다.
보안 사고
2020
UN이 움직였다 — R155·R156 채택
유엔 산하 자동차 규정 위원회(WP.29)가 차량 사이버보안 규정(R155)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규정(R156)을 채택했습니다. 10년의 경고 끝에, 자율에 맡기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규제 채택
2022
유럽 신차 의무 적용 — 법이 됐다
UN R155가 유럽 신규 차종에 의무 적용됐습니다. 사이버보안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차량은 유럽 시장 출시 자체가 불가능해졌습니다. 한국도 동일한 방향으로 수용했습니다.
규제 시행
2024
전체 신차로 확대 — 예외 없음
신규 차종뿐 아니라 모든 신차로 의무 범위가 확대됐습니다. 형식 승인 자체가 사이버보안 요건에 달려 있습니다.
전면 시행
2010년 첫 경고부터 2020년 규제 채택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연구자들이 반복해서 위험을 증명했지만 업계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중의 공포와 각국 정부의 개입이 규제를 만들었습니다.

왜 자동차 업계는 보안에 늦었나

IT 업계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보안을 개발 프로세스에 녹여왔습니다. 왜 자동차는 이렇게 늦었을까요. 변명이 아니라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 🔒
    원래 "닫힌 시스템"이었다 CAN 버스는 1980년대에 만들어진 프로토콜입니다. 설계 당시 전제는 "외부와 단절된 안전한 내부 환경"이었습니다. 보안이 필요 없는 구조였기에, 보안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전제가 커넥티드카 시대에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 ⏱️
    개발 주기가 IT와 다르다 스마트폰 플랫폼은 2년 주기로 바뀝니다. 자동차 플랫폼은 7~10년을 씁니다. 설계 시점에 몰랐던 취약점이 10년 뒤에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차들은 여전히 도로를 달립니다.
  • 🏗️
    공급망이 너무 복잡하다 차량 한 대에는 수백 개 부품사가 납품한 ECU가 들어갑니다. OEM이 모든 ECU의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지 않습니다. 보안 책임의 경계가 불분명했고, "우리 영역이 아니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 🛠️
    기능 안전이 먼저였다 자동차 업계에는 이미 ISO 26262라는 기능 안전 표준이 있었습니다. "고장 없이 동작하는 것"은 수십 년간 다듬어온 영역이지만, "외부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 💰
    보안은 비용으로 여겨졌다 ECU 하나당 몇 달러의 원가 차이가 수익성을 결정하는 업계에서, 보안 기능 추가는 곧 원가 상승이었습니다. 법적 의무가 되기 전까지는 투자 이유를 내부에서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동차 업계는 어떻게 달라졌나

규제가 생기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사이버보안이 "하면 좋은 것"에서 "하지 않으면 차를 팔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UN R155는 자동차 제조사가 사이버보안 관리 체계(CSMS)를 갖출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인증기관에 증명해야 합니다. 통과하지 못하면 유럽·한국·일본 등 주요 시장에서 형식 승인을 받을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변화가 단지 완성차 업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ECU를 납품하는 Tier-1, Tier-1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Tier-2까지 동일한 보안 관리 수준을 요구받게 됐습니다. 차량 사이버보안이 하나의 산업이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물론 규제를 통과했다고 모든 차량이 완전히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증기관이 심사하는 건 결국 "프로세스가 갖춰져 있는가"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생겼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시절과는 달라졌습니다.

마무리 — 산업의 전환점

2015년 지프 해킹은 단순한 해킹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자동차가 더 이상 "달리는 기계"가 아니라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가 됐다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의 전환이 오늘날의 규제를 만들었습니다. SDV(Software Defined Vehicle) 시대로 갈수록,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더 많아지고 외부 연결은 더 복잡해집니다. 자동차 사이버보안은 일시적인 이슈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핵심 요약

  • 자동차는 원래 폐쇄된 기계였다 — 보안을 고려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 커넥티드카 시대가 열리면서 외부 공격 경로가 생겼다
  • 2010년부터 학술 경고가 있었지만 업계는 10년간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 2015년 지프 해킹이 대중의 공포를 만들었고, 그 공포가 규제를 만들었다
  • UN R155(2020)로 사이버보안은 법적 의무가 됐다 — 미충족 시 형식 승인 불가
  • 책임은 OEM을 넘어 Tier-1, Tier-2 공급사 전체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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